Bible Note

바울의 고난.

2 Corinthians 1:8–9; Act 13:42-52;요12:9-11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난의 해석

바울은 고난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고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다.

왜냐하면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 겪는 일일 수도 있고 앞으로 겪을 일일 수도 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바울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 복음전파 그 자체로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였다.

고난의 일반적인 효과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도 그러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그 고난을 견디는 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예수를 고난받게 하시고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바울은 보았다.

고난의 끝은 죽음이다. 죽은 후에는 아픔도 슬픔도 없다.

그 후에 부활이 있다고 바울은 믿었다.

그런데 우리의 고난이 바울의 고난과 같은 종류의 것인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고난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복음이 어떤 복음이기에 고난도 함께 오게 되었을까?

본문을 보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가 한 몫을 차지했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로(대제사장들) 목숨을 잃으셨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는 것이 시기와 질투라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게 율법을 평생 지켜온 유대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시기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평생 지켜온 것이 은혜의 바탕이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토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토대는 십자가의 은혜다.

하나님은 이 공동 토대 안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같이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

자기의 힘으로 가는 구원은 예수의 은혜로 가는 구원 밖의 영역이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그러고 보면 시기심과 질투심은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못 가졌을 때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 그 결과물 아니였을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조적인 결정이 사실 궁극적인 결정이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영역 밖에 있으니 헛수고가 된다.

반면, 영역안에서의 노력은 상관없다. 있어도 되지만 없어도 결정된 것이다. 은혜로. 그런데 자기 힘을 의지하면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 된다.

노력을 해도 은혜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구원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는 고난도 같이 있다. 복음이 그렇다. 예수님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고난이 따른다.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

은혜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가져야할 마음은? 그 시기와 질투에 대한 정죄의 마음일까? 아니면 은혜로 가게되서 갖게 되는 미안한 마음일까?

유대인들에게 미안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아닐까?

그것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래서 감당할 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