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음을 두려워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에 영혼이 떨었다.
죄인인 것은 알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 아래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단지 그 분노와 책망이 은혜 안에 있기를 바랬다.
죄인이여서 고난받는 것 받아들일 수 있다.
범죄하여서 징계를 받는 것 받아들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런 상황이라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가?이다.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의 끝을 모르겠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조금만, 조금만 더 가슴에 되새기고 머리속에 세뇌일 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가 되는 것 같아 맥이 빠져갔을 것이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임을 알고 있었다.
맨 처음은 은혜와 자비를 의지해서 고난을 극복해 보려 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이정도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하나님 해도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How long? – 어느 때까지 때리실렵니까?”
사춘기 아이가 매를 맞다가, 애초 예상과는 달리 더 맞고 있다고 생각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러나 반대로 아이에게 매를 대는 부모도 마찬가지 심정이 있다.
“How long? 어느 때까지 내 말을 않들을 작정이냐?”
지속적인 괴로움이 그 마음에 있을 때 이런 물음이 던져질 것이다.
다윗은 이런 지속적인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들이댈 수 있었던 것은 “기억“과 “감사“였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죽은 후가 아니라 살아있을 동안에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게 들이 밀었다.
생명,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를 다루는 것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분께 감사를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당시 어떤 의미였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았었다.
그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그럴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억해서 뭘 어쩌라고?, 의도를 봐야 했었다.
나를 기념하라.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무엇인가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념하는 것은 그냥놔두면 잊기 쉬운 것을 계속 기억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기억해야 하는 그 무엇이 예수 자신일까? 예수가 하신 그 일일까?
돌에 새겨넣어서 문자만 영원히 기억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도가 파악되어야 한다. 방향을 발견해야 한다.
기억된 것을 통해 무엇인가 하시고 싶은 일, 이루어가길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고 믿어져야 한다.
예수는 기억하는데 예수가 하신 일, 예수가 이루었고, 이루고자 하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것이 된다. 헛수고, 헛장사, 헛농사이다.
고난중에, 징계아래 있을 때, 긴긴 터널속에서 무기력과 싸우고 있을 때,
예수의 기억은 다시 힘을 내는 힘이된다.
“어느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는 그와 함께 친밀하게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음을 눈치로 알 수 있다.
동행한다면서 목적지가 다르면,
친밀하다고 하면서 길이 다르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목적지가 가까이 오면 올 수록
예수님과 헤어져야 할 확률은 높아진다. 길이 다르다면…
의인이 죄인을 위해 죽어야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던 일…
한 번도 동행하면서 물어보지 않았다? 어디 가시는지 한 번도 여쭈어보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잘못의 시작이였다.
얌채같이 우리 개인적인 죄책감만 당랑 해결한다고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였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