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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절)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속에서 어리석은 자는 아이큐나 낮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보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킬때 사용했다.

어리석은 단어의 언어적 개념이 우리 현대 시대와 달랐다.

도덕적 결함이 왜 생길까? 처음부터 어리석게 태어났을까?

대답은 Yes이다.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래도 인간으로써 기본적인 양심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 사유와 철학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면 그 다음은 보나마나 잘못될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되면, 그 다음 나머지 단추도 마찬가지로 잘못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시편 기자의 탄식은 그래서 더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 윤리적으로 모자란 사람은 대놓고 자신이 어리석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면서 “그 마음속으로” 그 자신에게 “하나님이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사회적 위신, 자존심 때문일까?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시편기자는 그 속마음을 눈치챘다.

시인의 탄식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 도덕적으로 썩어서 더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외 없이,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럽게 되어 인간의 제 기능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인간다움은 꿈도 꿀 수 없다.

1절에서 3절은 햄버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1절과 3절은 시인의 탄식이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2절의 중심주제를 감싸고 있는 구조이다.

2절은 다시 처음에는 “주께서”로 시작하고 끝은 “살펴보신다.”라는 단어로 그 안을 다시  감싸고 있다.

그  중심에는 두개의 댓구되는 구절이 나타난다.

첫째,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이고

둘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라는 구절이다.

댓구법의 특성상

지혜로운 사람 = 하나님을 찾는 사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바다의 모래밭에서 모래 한 알 찾듯이 찾는 그 사람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반대되는 단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지혜로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3절에서 나오듯이 하나님의 찾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길을 찾는 것이다.

길은 많은 의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성경은 그것을 착한 일, 선한 일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일까?

그것은 선한 일, 착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죄많은 인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인간 혼자서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을 굳이 찾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선한 행위를 쌓아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 없이 않되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애초부터 시도할 마음이 없었다는 거.  왜 하나님이 없다고 거짓을 인정한다고 선언해 버렸으니까.

대개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를 조롱한다.

자본주의 구조안에서 돈은 현실이다. 과연 그런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속에서 어떻게 삶을 사는가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은 결코 녹록치 않다.

악한 세상속에서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한 사람이 밥먹듯이 악한 짓을 하기 때문이다.

탕자가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이방나라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탕진하게 되어 있다.

이민자가 아무리 가진 재산이 많아도 신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털리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현재의 미국 이민법의 근간은 그걸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아담의 국부론의 이해가 그걸 뒷받침한다.

국부론을 지은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윤리학자였다.

국부론을 지은 원래 의도는 양극화가 심화된 그 당시 사회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권력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고 가격을 시장에 맡겨놓아야 한다(Must)고 윤리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검은 손” 대신에 “보이지 않는 선한 하나님의 손”을 이야기 한 것이다.

세상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해도 악하게 적용하곤 한다.

국부론뿐만 아니라 인구론도 그렇다. 왜 선한 것이 주어져도 악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우리가 악해서이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했었다.

하나님의 법(의와 인과 신)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왜 지켜야 하는지 그 소중함을 몰랐었다. 의무론적으로 지켜야 하니까 지켰다. 의도를 망각했다.

희년과 안식년을 지켜야 하는데 왜 지켜야 하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그들에게 허락한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였다.

아무리 그들의 신앙을 개인적으로 잘 살아보려해도 그 법과 제도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그들은 뼈져리게 느낄 필요가 있었다.

탕자처럼 세상속의 그 악한 제도와 법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법과 제도가 얼마나 선하고 좋은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시편 14편 7절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끝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포로되었던 것을 하나님이 돌이키실 때에 완성된다.

불현듯, 우리가 지금 포로인 것을 깨닫는 그 시점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하나님 없이 교회가 부흥이 되면?  그 교회는 악인들의 소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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