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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스켄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개역개정 시편49:20)

남이하면 스켄달, 내가 하면 사랑이라고 한다.

스켄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일컫는다.

상식을벗어난 사랑이고, 조건이 않되는 사랑이다.

왜 날 사랑하지?

스켄달과 비슷한 사랑이 있다.  신비스런 사랑이다.

어떻게나같은 것을 사랑하지?

왜?라고 물으면 우리 수준에선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 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과 인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스켄달이 되었다.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기엔 상식에 벗어났기 때문이다.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랑이였다.  인류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짝사랑이였다.

삼손과 들릴라

삼손과 들릴라의 사랑은 이것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사기16:15-19)

삼손과 들릴라는 하나님과 인류의 대조적인 관계를 대표하고 있다.

삼손은 힘센남자이지만, 들릴라는 연약한 여자로 나온다.

삼손은 이스라엘 선택된 백성으로 나오지만, 들릴라는 블레셋 이방 민족의 백성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방 여인과 사랑에 빠진 삼손이였다. 맨 처음은 아니였을지 몰라도 타민족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삼손이 되었다.

보통 여자들이 극에서 나오는 걸 보면, 민족보다는 사랑을 선택한다. 대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을 선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들릴라는 민족을 위해 사랑을 철저하게 저버린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받기만 했지 사랑하지 않았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위대한 여인인가?

삼손의 사랑은 민족적 차별을 극복한 사랑이였다.

속임수,민족을 위해 스파이짓을 일삼았던 들릴라가 바로 우리 인류를 의미한다.

삼손은 나름대로 한 여인에게 있어서 만큼은 진실한 사람이였다.   들릴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평안히 잠들기도 했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들릴라는그 진정한 진실을 자기 민족을 위해 팔아 넘긴다. 마치 끝까지 신뢰를 주었던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와 같이…

그런데 우리는 본문 안에서 그녀가 삼손의 사랑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결국은 깨닫지 못하는게 인간의 종말이였다.  존귀함과 깨달음은 같이 가야 함을 알 수 있다.

존귀에 처하나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상관없이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깨닫는 것이다. 계층적 차별없이 모두다 싸그리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자체로 존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했다면 역시 다른 사람의 존귀함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딱 이 두 마디에 성경의 역사는 요약된다.

그런데 좀 더 진도나가면 그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죄인인 것만 강조하면 반쪽짜리복음이다.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가 없다. 수영도 물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도 마찰력이 있어야 굴러간다.

존귀함이 없이 죄의식만 심어주면 그것은 그냥 패배의식의 주입이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지배주의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온전하지가 않은 것이다.

에스겔에서의 예화

에스겔에서 어떤 한 소녀의 이야기가 나온다.(에스겔16:1-14)

긍휼의 하나님과 긍휼을 입은 핏덩어리 소녀를 통해 이스라엘의 출생의 비밀부터 그 아이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다지 잘난 것도 없고 내 세울만한 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은 선택하셔서 잘 돌보시고 키우셨다.  아름답게, 풍성하게 살게 해주셨다. 여기까지가 에덴동산이야기와 같다.

그런데 그들은 혼자 큰 것처럼 자신의 높은 곳에 세워두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저버렸다.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있었던 소녀 아이들보다 더 음행을 저질렀다. 이집트와 교역을 하며 그들의 신들을 가져와 그 우상에게 절하였다.  낙원을 걷어차고 스스로 실낙원의 길로 걸어 들어 갔다.  죄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보면 이런 예화는 이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호세아와 고멜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를 예를 들어 이야기 하고 있다.

호세아와고멜의 이야기가 그렇다. 고멜의 육체적 타락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상태가 인류의 대표 이스라엘 =고멜=인류, 의 상태였다.

호세아서는 야곱을 예로 들어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야곱의 이름의 상대적인 언어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야곱의 이름이 자꾸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하나님의 이름과 야곱이 이름은 같이 붙어 있다.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가 더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 이름의 역사적 배경은 창세기에 나온다. 이름을 부여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야곱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라? 천만에 그럴 리가 없다.

야곱은 태중에서 형 에서와 싸웠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리고 태어나서도 형 에서의 마땅한 장자권마저 속임수로 빼았았다. 삼촌과의 관계도 그랬었다. 끝내는 하나님과 씨름하기 까지 인생이 늘 욕심으로 얼룩졌다.  그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본질적인 해결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낮아지고 약해지고 연약해지는 것이 그가 가야할 길이였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돌이켜야 하는가?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할 차례다.  수영선수가 벽을 두고 턴하듯이 우리도 턴할 기반, 지지벽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죄악된 실상이 그 벽이 될 수 있다. 죄악이 굳건할수록  회개도 굳건해진다. 죄를 지적하는 것 없이 회개가 일어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이다. 왜 턴해야지? 존귀함이 깨달아 져야 턴할 수 있다.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에 서 있다면, 회개의 턴은 길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귀함이 없다면 수영 자체를 할 이유가 없어진다.

턴하지 않고 벽에 부딛혀 사망!!!

예수와 우리

예수는 우리에게 복음이다. 십자가로 설명하셨다. 말도 않되는 사랑 이야기, 신랑 예수님의 신부 우리에게 향한 대쉬가 바로 복음이다.

사사기의 들릴라처럼 , 에스겔서에서 그 소녀처럼, 아가서의 술납미여인 처럼, 호세아의 고멜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개인적인 그 사랑엔 이유가 없었지만,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엔 이유가 있으셨다.

왜 날 사랑하나?, 개인적인 질문에는 답변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사랑과 정의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그 이름만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거였기 때문이다.

사랑과 정의, 그리고 희망

사랑과 정의를 지키는 것은 이후에 오는 권태함을 물리쳐줄 하나님과 같이 가는 선물인 것이다.

구원이후에 올 것은 사랑과 정의이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존엄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혼인 이후에 올 당연한 신혼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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