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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달린 왕

구약의대표적인 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다윗일 것이다.

그런데 다윗과 연관되어 있는 왕이 있다.

사울왕과 압살롬이다.

사울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의 왕이였고, 압살롬은 왕인 다윗에게 구테타를 일으킨 사람이였다.

다윗은 위에서 내리 누르고, 아래에서 처 올라온 경험을 모두 했다.

사울과 압살롬은 다윗과 악연을 맺고 있었다. 비록 사울은 다윗의 장인어른이고, 압살롬은 다윗의 자식이였다. 그렇지만 사울과 압살롬 모두 와의 자리를 두고 다윗과 전쟁을 벌였다.

물보다 진한 것이 피라고 하지만, 그 피보다 진한 것은 권력에 대한 욕구인가 보다.

나라를 잘 이끌기 보다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욕구가 인간의 본질임을 두 사람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윗도 그러했지만 사울 또한 용모가 준수했다.  압살롬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한다. “Finishing Well” 잘 마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나가다가 끝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동안 쌓은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사울과 압살롬

사울과 압살롬은 우연치 않게 인생의 끝이 사람들이 보기 쉬운 높은 것에 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울은 죽은 뒤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성벽 높은 곳에 달렸고, 압살롬은 나뭇 가지에 머리가 걸려 죽었다.

죽은 뒤에 그 뼈가 높이 달리는 것은 적들에게는 승리의 표시이고 아군에게는 패배의 표시이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개역한글 삼하 21:12 )

사울은 초대 왕이였지만 왕좌를 죽음으로 밖에 내려놓지 못하다가 전쟁에서 사망했다.

압살롬(삼하18:9)

압살롬은구데타로 왕이 되려했던 왕자였다.

왕의 혈통이면서도 욕심부리다가 아버지인 다윗 왕을 거역하고 그 싸움에서 나무에 달려 사망하였다.

 

나무에달린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이다.

잘하면 명예스러운 위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낮은 곳보다 더 수치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허다하다.

군인은 싸우다 죽어야 명예로운 죽음이 된다. 하물며 왕이라는 작자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면 그것은 수치중의 수치이다.

헤롯과 예수

구약에서와는 달리 신약에는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왕은 헤롯왕이였다. 왕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계략을 써서 왕이 된 분봉왕이였다.  건강하지 못한 권력은 아부를 좋아한다. 속성자체가 그런가 보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아부떠는 것을 그 왕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그 왕 앞에서 고자질 하는 것(후욕)을 겸손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인간 세상에는 많다.

헤롯이 그런 류의 사람중에 하나다. 분봉왕 여우 같은 헤롯.

세상 왕들은 왕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헤롯은 자신의 왕자리를 지키기 위해 세례요한도 죽였다. 왜 그랬을까? 쉽게 얻은 것이기 때문에 쉽게 잃어버릴 거라는 생각때문이였을까?  정통성 없는 왕이였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을까?

사람들은 그 앞에서는 모르는 척해도 마음속으로는 그걸 알았다. 헤롯은 왕이지만 왕이 아니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건드려보면 안다. 자존심.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거 건드리면 바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얼마나 못났으면 힘없는 어린아이도 그의 경쟁상대가 된다.

교활한 여우 헤롯은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난 그 소식을 듣고 영접하기는 커녕 모두 2살 미만의 사내 아이들을 사살했다.  몰래 조용히 여우답게 찾아가서 거사를 진행하려했지만 외지인 동방박사들에게도 그 속임수가 들통이 났다. 그  바람에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2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치사하게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 윤리와 도덕 의식은 도데체 어디에 갔는지…

왕이 아니면서 왕인척 하는 헤롯이 있었는가 하면, 왕이면서 왕이 아닌 척,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헤롯과 동시대에 같이 살았다.

예수님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왕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권력을 추구하신 적도 없으셨다.오히려 자기를 드리려고 자진해서 그렇게 오셨다.

“인자도 높이 들려야 하리라”

 

민21:9 – 놋뱀과 불뱀

뱀에 물리는 경우는 방심한 틈을 타는 경우가 많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곰도 피하고 호랑이도 피해왔지만 작은 오두막집 벽틈에 숨어 있었던 뱀에게 물려 죽는 경우는 인생이 그만큼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요롭지만 자유가 없었던 그 죄악된 이집트를 떠나 거칠고 험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로의 생활은 그나마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무색하게, 어려움이 닥쳐오자 그 즉시로 하나님께 원망의 화살을 날렸던게 우리 인간이다.

원망은 습관이 되어 입에 달고 살게 마련이다. 모든 잘못은 , 모든 어려움은 다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 그게 우리의 속성이다. 보통사람은 보통 잘되면 내탓 잘 못되면 조상탓한다. 그러니 보통사람처럼 생각않고 육체에 그 인생을 맡기면 큰 탈 난다.

놋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들리게 한 후 그 놋뱀을 처다보면 살 것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그 쉬운 것 조차 하지 않고 대부분 죽어갔다.

너무 쉬운 거라서 믿지 못했던 것이다.

광야에서는 믿음이 필요했었다.  믿음은 쉽지만 어렵다. 죽기 전까지…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높이 들려야 하겠다고 하셨을까?

수치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우리 인생을 대신해서?  그렇게 하면 적들은 좋아라 할텐데…

예수님은 왕권을 추구한게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

우리도 수치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그 인생을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였다.

인생별거 아니라는 것만 깨달아 지는게 우리의 나이이다.

나이가 들면, 세월이 가면,  좀 나아져야 하는데 사태는 더 악화되어 간다.

이제 좀 되었겠지 숨돌릴만 만하면 흰 머리카락이 우리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쌓으려하고 채우려 하는게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비워져 가고 깎이고 없어져가고 닳아져 가는게 인생이다.

나와 예수 , 누가 왕인가?

한 나라의 최종의사결정자가 있다. 가정에도 직장에도 마지막 최후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 그 조직안에서는 왕이다.

도시의최종 의사결정은 시장이 하고, 나라의 최종의사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그러나 개인도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로 보자면 최종결정할 인생의 왕좌는 있다.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놓지 않으려 하면 사울과 같이 되고 그것을 빼앗으려하면 압살롬과 같이 될 수 있다.

우리 인생과 예수는 언젠가는 한 번 결판을 내야할 전쟁을 치뤄야 한다. 누가 왕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의 최종 의사결정을 한다면 우리가 왕이라는 뜻이다.

2000년 전에 예수는 그 왕권을 내려놓으시고 왕권을 주시려고 오셨다. 우리에게…

높이 메달리셨다. 사단에게 승리의 표시가 되셨다. 우리에겐 우리를 대표하셨으니 실패의 표시로, 육체의 죽음의 표시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과거는 제쳐놓고,  예수가 왕으로 지금 다시 오셨을 때 우리는, 나는 왕좌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 인생을 마음껏 결정하면 예수가 왕이 아니라는 고백과 같다.

영접한다는 의미는 예수를 종으로 맞아들이는게 아니라 왕으로 모시는 것이다.(요1:10-13)

요1:11절에 “백성”이라는 단어의 상대되는 단어는 왕이다.

그러므로 요1:12절의 영접의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느냐 자기 종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가 신앙 색깔이 분명 달라진다.

최종결정을 누가 했느냐? 누가 하느냐? 무슨 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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