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ew Grammer of Experience” – 문법의 필요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뜻이 중요하다. 그러나 단어와 단어 사이에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문법이다.
같은 단어라도 문법이 달라지면 다른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문법 -> 의미 -> 이해 -> 지식, 경험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가셨습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셨습니다.”“지금 나랑 장난하나?”
“장난 지금 나랑하나?”
문법이 다르면 뜻과 의미가달라진다. 이해가 달라진다. 지식도 지혜도 달라진다. 문법은 아는 것은 이해하는 것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과우리 사이의 대화에서 문법이 필요한데 그 기준 = 정의.
아브라함이 선택된 이유, 목적,의도를 살피려면 하나님의 의도가 보이는 문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8장19절에서 그 의도를 볼 수 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아브라함 개인의 능력도 아니고 자격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도가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을 알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길을 방황하지 않고 진도 나가 줄 수 있다.
죄만 해결하면 다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초딩 때 띄어야 할 구구단과 같다.
아브라함, 그를따르는 자식들과 가족들을 공의와 정의로 주의 길을 지키라는 뜻에서 선택하셨다고 분명 그 의도를 말씀하고 있다.( 창18:18-19)
사실 인류가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 인류를 믿어주셨다.
아담과 약속하신 후 에덴동산에서 이끄시고 어떻게 하나 두고 보시고 믿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먼저 믿어주셨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받는다? 천만에, 만만의 콩떡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알 수 있는가? 공의와 정의이다.
그런데 믿음의 의도 또한 파악되어야 한다.
우리를선택하신 의도는 사실 처음부터 “공의와 정의, 주의 길을 지키는 것”이였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는냐?
네 동생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정의였다.
죄를 이야기 한다면 반드시 정의를 이야기 했어야 한다.
그런데 죄를 이야기 하긴 하는데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 이야기는 대화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리고 가인에게 하신 질문 보다 우선하는 질문은 공의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약자였던 아벨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셨다. 심판자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신 것보다는 먼저 죽은 아벨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셨다.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하나님은 예레비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9장 23장 24절
9: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9: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문법을 모르니 모든 이야기마다 오해가 생긴다.
“아” 하면 “어”로 알아듣게 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그러니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잘못된 이해가 쌓이고 쌓여서 자기 지혜, 자기 힘, 자기 재산을 자랑한다. 그 영향력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신뢰한다. 이 때 공의는 물건나 간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외친 선지자 호세아가 있다.
호세아가 하나님께 물은 것은 사랑이였을까? 정의였을까?
호세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되어가는 상황이 불의할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다.
나는 잘 못한 것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불의한 일을 당해야 하나? 그것도 나보다 더 악한 사람에 의해서…?
공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였던 거다.
정의 다음에 또 다시 오는 단어는 믿음이다. – 다시 오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큰 줄기로 보면 사실 거의 같은 등가로 보아야 한다.
이제 주께로 돌아가자. 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자. 애써 주를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호세아 6:1-3)
본문은 애써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의 오심을 비유하기를 새벽여명,가을 비,봄비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항상, 어김없이, 신실하게, 성실하게, 변함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가 불의한 죄인인 것을 알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크기를 알아갈 수 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도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 새벽 빛같이
생각하는 것마다 악한 것을 알고 계셔도, 그래서 노아의 홍수처럼 다 포기하고, 끝내버리고 싶으셔도 다시 한 번 믿어주시고 공평하게 비를 내려 주신다.
또 다른 선지자 하박국도 비슷한 대화를 하나님과 했었다.
하박국 2:3-4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살아라의 의미는는 무엇일까?
24절의 대비된 구조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두 문장이 “그러나”로 연결되어 있다.
의인과 대비되는 단어는 교만한 자, 정직하지 못한자이다.
의인으로 사는 것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리고 바로 서서 정직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오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우리가 의인된 짓을 해서 의인이 되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왜 의인이 악인에 의해서 멸망당하는가? 억울하고 원통함이 생길 수 있다.
그냥 입술로만의 립써비스로 고백되는 자기 중심적인 자기확신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으로는 믿음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베드로가 세 번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다.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저절로 느껴진다.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고 난 후 비로소 주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처음도 “정의”로 대화하였고, 그 끝도 “정의”로 대화해야 다음을 진행할 수 있다.
죄책감만 씻는 신학으로는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 없다.
“정의”라는 단어가 그 대화의 끝을 정해준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시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