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구절

길을 가도 예수, 한 곳에 정착해도 예수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번제물은 다 태워서 나에게 바치지만, 다른 희생제물은 너희가 먹는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번제든 무슨 제사든, 고기는 너희가 다 먹으라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 나는 그들에게 번제물이나 다른 어떤 희생제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도 않고, 명하지도 않았다.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너희는 잘 될 것이다 하는 것뿐이었다.

(예레미야 7:21-23@표준새번역)

그 옛날 그 옛적,

처음에는, 원래는 이랬었다.

희생제물, 번제물 , 제사 같은 거 말한 적도 없었고 명하지도 않았었다.

그 대신 명하신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였다.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을 명하여 말씀하셨다.

본 구절에는 종교와 순종이 대립되어 나타난다.

종교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였다.

그 대신 명하신 “그 길”로 가라는 것이였다.

그 길로 가는 순종이 없다면

제사, 제사장, 성전, 제단 이런 것들은 사기이고 거짓말이며 환상일 수 있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7:4@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종교로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하셨으며, 종교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대신 일찌기 하나님은 참 길을 일러 주셨다.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예레미야 7:5-7@표준새번역)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순종을 잘 해왔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어 왔는가?

 

제사를 드리는 것도 순종 아니였나?

 

순종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 집착해서 무엇을 순종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순종하는 성품만 인격만 닦으라 한다면 이 또한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스맨은 노맨보다 더 다루기 어렵다.

예스 해놓고 딴 짓거리하는 첫째 놈보다,

노 해놓고 마음을 돌이켜 “예” 한 창녀와 세리가 훨씬 순종적인지도 모른다.

순종은 성품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처럼,

주의 길을 가지 않는 사역자라면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원의 길도  “다른 사람과 전혀 상관없이 각자의 제사에 열심을 다하면 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는 그렇게 만드는 사역자는 사기성이 짙은 종교이며 종교꾼이다.

신앙이 잘 못 정착하면 종교가 되고,

교회가 길을 가지 않으면 절간처럼 되어버린다.

성전을 헐으라고 하시며 그 성전을 삼일만에 짓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스스로를 “그 길”이라고 하셨다.

인습을 타파하고 성상을 헐고 가야할 길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성전이다.

예언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려는 것도 속임수일 수 있다.

교회의 터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예언이나, 은사나, 방언이나, 말씀, 그 어떤 신령한 것이라고 해도 교회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않는 것이다.

구역모임, 셀모임, 다락방모임이 친한사람끼리, 친척끼리, 또는 잘 통하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어 교제하는 것이라면 터를 잘못 닦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임은 정체되기 쉽다, 에너지가 안으로 흐르면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먼저는 그룹간의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그 속에서 의사결정을 잘 조정해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불신을 조장하게 된다.

지도자 밑에 두 세력이 대립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지도자 자신이 균형을 맞추어 가며 즐기게 된다.

독재자의 위험이 여기다.

그리고 난 다음 모든 의사결정기구를 무력화시킨다.(너희들은 자격미달이야하면서…)

그래야 균형자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질, 자격 따지기 일쑤다.  성품,성격,됨됨이 이런 것들이 도마에 오르며 저울질 한다.

사람을  바둑판 바둑처럼 다룬다.   끝을 보지 못한다.  그게 어리섞다는 증거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온다.

자신의 그동안 뿌려놓았던 거짓이 드러나는 시기가 온다.

그럴 때 내세우는 명분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이 때 지도자의 결정능력이 드러난다.

쉽게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입단속 들어가고 언론을 통제한다.

어떻게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또 거짓을 가리고 안으로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누군가는 거짓으로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계속 사냥감을 찾게 되므로 조직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 와해되어 간다.

같은 패턴이 몇년에 한 번씩 반복된다.

외부에서 수혈이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직계가족 친인척뿐이다.

그 동안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잠시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누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스스로 위선은 드러난다.

아무리 가린다해도 생명을 가릴 수는 없다.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생명을 죽이면 살인자이다.

우리 가슴속 주홍글씨는 생명이 더 중요함을 알고 있다.

진실은 얼마든지 생명에게 양보할 수 있다.

그런데 생명까지 속이려든다면 그 끝은 거짓으로 얼룩질 것이 분명하다.

이제 답 나온다.

길, 진리, 생명

길을 가도 예수 그리스도,

잠시 집에 머물러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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